최근 독감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약국마다 해열제 품귀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소아과 진료에 필수적인 ‘액상형 타이레놀’과 같은 특정 제형의 품절 사태가 한 달 가까이 지속되며 환자들의 불편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대한약사회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이후 발열 환자가 늘어나면서 타이레놀 품절이 장기화되었으나, 동일 성분의 아세트아미노펜 제제가 시중에 충분하므로 약사와의 상담을 통한 안전한 대처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품절 알림 신청 상위권에는 어린이타이레놀현탁액뿐만 아니라 세토펜현탁액, 삼아탄툼액 등 다른 소아용 해열진통제들이 다수 포진하며 위기의 확산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약품 품절 사태는 단순한 계절적 수요 폭증을 넘어 수년째 반복되는 구조적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지난 10월까지 매달 2만 건 이상의 의약품 품절 신고가 이어졌으며, 감기약뿐만 아니라 항생제, 혈압약 같은 주요 의약품의 수급 불안정도 만성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의약품 유통 시스템이 국민 안전과 직결됨에도 불구하고, 타 산업 대비 투명화 시스템 도입이 늦어 품절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만성 품절 사태를 유발하는 세 가지 구조적 난맥상
전문가들은 의약품의 만성적인 품절 현상이 제조나 생산의 문제를 넘어, 불투명하고 비효율적인 국내 유통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합니다.
1. 과도하게 경쟁적인 도매업체 난립 구조
국내 의약품 제조소는 300여 곳에 불과하지만, 의약품 도매업체 수는 최근 10년 사이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약 4천 개에 달합니다. 이는 제조소의 열 배가 넘는 수치로, 과도한 경쟁 환경을 조성합니다. 의약품은 약가 고시제에 따라 정가가 정해져 있으며, 도매업체의 마진은 통상 2~5% 수준으로 매우 낮습니다. 이처럼 저마진 구조에서는 대량 공급을 통한 빠른 회전율 관리가 도매상의 생존 핵심이 되는데, 업체 수가 급증하면서 이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특정 의약품의 품절이 발생하면, 난립하는 도매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재고 확보에 나서며 시장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정작 약국이나 환자들에게 필요한 의약품은 제때 공급되지 못하는 난맥상이 생깁니다. 이러한 유통 혼란을 막기 위해 의약품 포장단위별 일련번호 도입을 통해 유통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이는 유통 거래의 정확성을 확보하고 재고 관리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2.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불법 행위 만연
의약품 수급 불균형 상황을 틈타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도 빈번하게 적발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비만 치료제인 ‘삭센다’를 구하기 어려운 약국에 상대적으로 수요가 낮은 ‘위고비’를 묶어서 주문하도록 강제한 도매업체의 '끼워팔기' 사례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는 약국의 의약품 주문 선택권을 박탈하고, 약사법 시행규칙상 '매점매석 등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한, 일부 도매상은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해야만 품절약을 제공하는 강매 행위를 하거나, 심지어 특정 영업사원이 진해거담제 시럽이 품절될 수 있다는 허위 문자를 유포하여 실제로 품절 사태를 유발하는 불법 행위까지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전문의약품의 불법 유통은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삭센다와 위고비 등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에 대한 온라인 불법 판매 및 광고가 150건 이상 적발되는 등 유통 시스템 전반에 대한 관리감독의 부재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3. 낮은 약가로 인한 '코리아 패싱' 문제
만성 품절의 또 다른 축은 혁신적인 신약의 국내 도입이 늦어지거나 아예 기피되는, 소위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현상입니다. 국내 약가 수준이 해외 주요국에 비해 낮게 책정되는 경향이 강해, 다국적제약사들이 한국 시장 출시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한국에서의 낮은 약가가 중국 등 다른 나라와의 약가 협상 시 기준이 되어 글로벌 수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제약사의 우려 때문입니다.
특히 국내 약가 제도는 신약의 가치를 적절하게 평가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건강보험공단이 약가 책정 시 수십 년 전 개발된 구약의 가격부터 협상을 시작하거나 , 약을 일정량 이상 사용하면 약가를 재협상하여 인하하도록 하는 ‘사용량-약가 연동제’를 운영하기 때문에 , 제약사 입장에서는 신약 도입을 통해 박리다매를 시도하거나 적정 가격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제약이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위기를 해소할 정부의 전방위 약가 및 유통 개선책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구조적 난맥상을 해소하기 위해 약가제도 전반을 손보는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이 개편안은 혁신 신약의 신속 도입, 필수의약품의 안정적 공급, 그리고 약제비 지출의 합리화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추진됩니다.
1. 복제약 가격 합리화 및 인하
정부는 해외 주요국의 사례를 참고하여 제네릭(복제약) 중심의 약가 구조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의 54% 수준인 복제약 가격 산정률을 40%대 수준까지 낮추기로 했으며 , 늦게 출시될수록 가격이 더 낮아지는 ‘계단식 약가 인하’도 강화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약제비 지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제약사들이 복제약 위주가 아닌 신약 개발(R&D)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개편안의 주요 조치들은 2026년 7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될 예정입니다.
2. 신약 접근성 강화 위한 '약가 유연계약제' 도입
'코리아 패싱' 문제를 해소하고 혁신 신약이 국내에 빠르게 도입될 수 있도록 가칭 '약가 유연계약제'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의약품의 외부에 표시되는 가격(표시가)과 건강보험공단이 실제 지불하는 가격(실거래가)을 달리하는 방식의 이중 가격제입니다.
정부는 표시가를 해외 주요국(A8 조정 최고가) 수준으로 고시하여 제약사들의 글로벌 약가 참조 우려를 낮추는 한편, 건보공단과 제약사가 별도의 환급 계약을 체결하여 실제 지불액을 낮추는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 제도는 2026년 2분기부터 추진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환자의 혁신 신약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3. 필수의약품 공급 안정화 제도 전면 개선
환자 진료에 꼭 필요하지만 경제성이 낮아 생산 또는 수입 원가 보전이 필요한 ‘퇴장방지의약품’ 제도가 전면적으로 개선됩니다. 신생아용 항생제, 해열제, 응급 상황에 필수적인 페니실린 등은 공급이 중단될 경우 필수의료 서비스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선안에 따르면, 퇴장방지의약품의 지정 기준을 현실화하고, 원가 보전의 실질적인 기준을 대폭 상향합니다. 특히 연간 청구액 기준을 현행 1억 원에서 5억 원으로 대폭 높이고, 정책 가산을 최대 7% 수준으로 신설하여 제약사의 실질적인 원가 보전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또한 국산 원료를 사용한 국가필수의약품에 대한 약가 우대를 기등재 품목까지 확대하고, 가산 기간을 장기적으로 보장하는 등 공급 안정화를 위한 유인을 적극적으로 제공합니다.
정부의 의약품 공급 안정화 및 약가 제도 개선안 요약
정책 목표 세부 개선 방안 핵심 내용 및 예상 시행 시기 복제약(제네릭) 관리 가격 산정률 인하 및 계단식 약가 강화 복제약 기준가를 오리지널 대비 40%대 수준으로 단계적 인하. (2026년 7월 시행) 신약 접근성 강화 약가 유연계약제 (이중 가격제) 도입 표시 가격과 실거래가를 분리하여 '코리아 패싱' 방지. (2026년 2분기 추진) 필수 의약품 안정화 퇴장방지의약품 제도 전면 개선 원가 보전 기준(청구액 5억 원) 대폭 상향 및 정책 가산 신설. (2026년 하반기 추진)장기적 유통 효율화 논쟁: 성분명 처방 도입의 명과 암
의약품 품절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고 유통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약품 성분명 처방' 도입 논쟁이 뜨겁습니다.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특정 상품명 대신 약물 성분명으로 처방하고, 약사가 동일 성분·함량·제형의 복제약(제네릭)으로 바꿔 조제(대체 조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성분명 처방 활성화의 필요성
성분명 처방 도입을 지지하는 약사회와 시민단체들은 이 제도가 의약품 이용의 효율성과 환자 편익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분명 처방을 통해 대체 조제가 활성화되면, 품절된 약을 구하기 위해 환자가 여러 약국을 돌아다니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으며, 이는 특히 수급이 불안정한 의약품에 대한 환자 불편을 해소하는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성분명 처방은 연간 약 7조 9천억 원의 약값을 절감할 수 있다는 추산도 나오며 , 이는 약품비 절감을 통한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성을 높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합니다.
최근 대체조제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실무적 진전도 있었습니다. 기존에 팩스로 처리해야 했던 대체조제 사후 통보 방식이 전산 시스템 연동으로 개선될 예정입니다. 이는 약사들의 행정적 부담과 병의원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크게 줄여, 그동안 저조했던 대체조제율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의사 단체의 강력한 반발 논리와 쟁점
반면 의사 단체들은 성분명 처방 도입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분명 처방이 의사의 '처방권'을 침해하며, 품질이 낮은 제네릭이 섞여 있을 가능성 때문에 국민 건강을 볼모로 잡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비판합니다.
의료계는 같은 성분이라도 제조사별로 사용하는 첨가제나 제형이 다르기 때문에 약효나 부작용에 임상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며, 특히 치료 효과의 범위가 좁은(협치료역) 의약품의 경우 환자에게 심각한 부작용이나 치료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복제약으로 대체 조제했을 때 부작용이 발생하면 의약품 품질, 처방, 조제 과정 중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문제도 주요 쟁점으로 남아있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의약품 품절 해소라는 공익적 목표와 의사의 전문성, 그리고 의료계 내 주도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지점입니다.
결론: 지속 가능한 의약품 공급 시스템을 향하여
최근의 의약품 품절 사태는 단순히 유행성 질환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저마진 구조와 도매업체 난립으로 인한 불투명한 유통 시스템, 그리고 낮은 약가로 인한 신약 도입 지연이라는 복합적인 구조적 난맥상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정부의 약가 제도 개편안은 혁신 신약 도입 촉진(유연계약제)과 약제비 지출 관리(제네릭 가격 인하)라는 상반되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중요한 정책적 시도입니다. 특히, 시장 경제 논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필수의약품 수급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퇴장방지의약품에 대한 원가 보전 기준을 대폭 상향한 것은 환자 중심의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의약품 공급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구조적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첫째, 의약품 유통의 투명화입니다. 도매상 난립을 규제하고, 불법적인 끼워팔기 및 매점매석 행위에 대한 법 집행을 강화하며, 의약품 일련번호 제도를 실질적으로 정착시켜 유통 경로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합니다. 둘째, 성분명 처방 논쟁에 대한 사회적 합의입니다. 환자의 안전과 제네릭 의약품의 품질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고, 부작용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제도적 장치를 선행적으로 마련한다면, 성분명 처방은 의약품 품절 문제를 해결하고 약제비를 절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속적인 공급 안정화는 이러한 구조적 난맥상을 하나씩 해소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